‘스물다섯 스물하나’ 희도의 기억속 ‘그해 여름’이 사라진 까닭은?

[OSEN=김재동 객원기자]  때는 1999년 여름, 장소는 포항 앞바다였다. 유림(김지연 분)과 지웅(최현욱 분)과 승완(이주영 분)도 함께였다. 나희도(김태리 분)가 말했다 “나 왜 이 순간이 영원할 거 같지?” 백이진(남주혁 분)이 답했다. “영원할 건가 보지.” 나희도가 부연했다. “영원하자!”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그들 앞에서 끊임없이 부서졌다.

2022년 어느 여름날. 차안에서 딸 김민채(최명빈 분)가 조른다. “우리도 여행 가자!” 41살 엄마 나희도(김소연 분)가 답한다. “이 (코로나)시국에 어딜 가!” 민채가 불퉁하게 대꾸한다. “엄마는 갔잖아.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바다. 엄마 앨범에서 사진 봤어.” 나희도가 아연해진다. “내가 고등학교 때 바다를 갔다고? 걔네랑 내가 바다를 언제 갔어? 기억 안 나는데?” 나희도는 정말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

김민채가 툴툴댄다. “엄청 영원할 것처럼 사진 다 찍어 놓고는!” 나희도가 달관한 듯 말한다. “영원한 게 어디 있냐. 모든 건 잠시뿐이고 전부 흘러가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니란다.”

tvN 토일드라마 ‘스물 다섯 스물 하나’ 10화에서 1999년 여름은 나희도에게 사라진 시간이었다. 혹은 나희도가 짓뭉개고 외면한 시간일 지도 모른다. 생애 단 한 번의 수학여행이었는데.. 오래된 사진첩 속에만 박제돼 있는, 세월 속에 파편화된 시간들일 뿐이었다.

백이진 때문이겠지 싶다. 그 해 스물 세 살의 백이진은 무지개를 보며 열 아홉 나희도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열 아홉 나희도에게 그 순간은 빛났고 감미로왔다. 그리고 41살 나희도 옆엔 백이진이 없다. 그 사랑은 결국 불발됐고 10회를 달려오도록 두 사람을 응원한 시청자들은 그 미완의 이유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과연 유행가 가사처럼 ‘부서진 파도처럼 쓸쓸한 추억만 남기고 가버린’ 그들의 사랑얘기엔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까?

먼저 ‘불가근 불가원’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취재원과는 너무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말라는 기자 원칙이다. 너무 가까우면 기사의 공정성을 잃고 너무 멀면 취재가 안됨을 경계하는 금과옥조다.

이 이유가 맞다면 드라마는 이미 많은 떡밥을 뿌려놓았다. 희도의 스승 양찬미(김혜은 분)와 희도의 엄마 신재경이 친구에서 원수로 돌아선 이유도 이 때문이었고 백이진이 공항까지 쫓아가 심판 인터뷰를 따냈을 때도 다시 한번 거론됐었다.

양찬미는 나희도에게 백이진과의 친분관계를 확인하며 기자랑은 친해지면 안된다고 강조했고 신재경도 이진에게 희도와 너무 친하니 인사때 스포츠국을 떠나라고 강요했다.

백이진의 각성도 있다. 희도를 향해 “넌 언제나 나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라며 희도 때문에 공항까지 쫓아갔지만 기자라면 그게 누구 때문이라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고 반성했다.

백이진이 스물다섯 기자 3년차 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지고 희도로 인해 각성한 백이진의 기자정신이 스물 한 살의 나희도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을 수도 있다. 양찬미에게 상처 입힌 신재경처럼. 그리고 그 사실을 양찬미가 그랬던 것처럼 희도도 용서할 수 없었을 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로 인해 나희도는 딸에게 영원한 건 없으며 모든 건 잠시뿐이고 전부 흘러가는 것이라고 조언하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기억조차 못한다? 나희도라면 그럴 수 있다. “나는 요즘 너 땜에 진짜 미치도록 복잡해. 나 너 질투해. 나 너 좋아해. 근데 열등감도 느껴. 이게 무슨 소리 같애? 난 분명한 게 좋은데 너 땜에 머리가 너무 복잡해. 그래서 나 너 싫어!” 열 아홉 나희도가 백이진에게 한 말이다. 요약하면 ‘좋아하는데 복잡해서 너 싫어’다. 더 축약하면 ‘너 좋은데 싫어’다. 전혀 논리적이진 않지만 나희도라면 충분히 가능한 결론이다. 피스트에서의 무수한 패배와 좌절에도 긍정의 멘탈을 유지할 수 있었던 나희도 비장의 무기는 그런 단순함였다.

그 해 여름 나희도는 작고한 아버지에 대해서도 친구들에게 말했다. “슬펐지. 그런데 진짜 슬픈 건 엄마랑 나는 아빠 이야기를 안 한다는 거야. 그냥 서로 절대 안 해. 없었던 일인 것처럼. 그런데 난 하고 싶거든. 아빠 보고 싶다고. 엄마도 아빠 보고 싶지 않냐고. 나만큼 아빠 잘 아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는데. 그런데 안 해”라고.

욕하면서 닮는다고 신재경의 그런 성향이 나희도에게도 이어졌고 여기에 나희도의 단순함이 더해져 그 혼돈의 순간을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삭제해 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희도가 기억하건말건 그 해 여름 바다는 아름다웠다. 고유림은 ‘착한 딸 콤플렉스’를 잠시 내려놓고 또래처럼 즐겼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지웅은 이진을 통해 남자의 아름다움에도 눈을 떴다. 세상이 시니컬한 사회비평가 승완조차 자신의 해적방송 팬인 이진 동생 이현(최민영 분)을 만나 4살 연하남에게 핑크빛 소망을 심어주었다. 희도는 너무나 당연하게 이진이 있어 좋았고 이진 역시 희도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박제될 수 없는 아름답고 빛나는 시간들은 등장인물들만의 몫은 아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시청자들의 리즈 시절마저 사진첩으로부터 소환해내고 있음직하다.

/zaitung@osen.co.kr

[사진]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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