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서 공부한 우크라 교수의 탈출기..”세 딸은 남겠다며 울었다”

“열차가 들어오자 사람들이 달려갔다. 아이 손을 놓친 부모는 울부짖었다.”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모힐라 아카데미 국립대학 교수인 가리나 솔로베이(43)가 KDI 국제정책대학원을 통해 우크라이나 탈출기를 보내왔다. 그는 지난 1일 키이우를 탈출해 우크라이나 서부도시인 리비우·자모스크(폴란드)·베를린(독일)을 거쳐 지금은 암스테르담(네덜란드)에 있다. 가리나는 마리아(16)‧사샤(14)‧아나스타샤(9세), 세 딸과 함께 버스와 기차로 국경을 넘었다.

우크라이나를 탈출해 4일 베를린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기차를 탄 마리아(16)와 사샤(14). [가리나 소로베이 제공]

가리나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개발정책학을 공부했다. 그의 우크라이나 탈출은 한국에서 함께 공부한 외국인 동기들과 피난민을 돕는 유럽의 자원봉사자 덕에 가능했다. 전쟁에 직면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사회의 연대다. A4용지 5페이지(3359단어) 분량의 영어로 보내온 가리나 교수의 글을 요약해 그의 시점으로 싣는다.


가기 싫다며 우는 딸…함께 울어

2월 24일 오전 5시쯤 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위치한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단번에 폭발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키이우에 남겠다고 생각했다. 그날도 수업을 했다. 50명이 참여하는 온라인 수업엔 6명만 들어왔다. 다른 학생들은 대피 중이라고 했다.

며칠간 폭격으로 집 주변 건물들이 부서졌다.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고, 통행이 제한돼 오후 5시 이후로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세 딸의 안전을 더는 지키기 어려웠다. 2월 28일, 서부도시인 리비우로 가는 열차를 예매했다. 짐을 챙기는 내내 딸들은 울었다. “집에 남고 싶다. 아무 데도 안 가겠다”는 딸을 설득하며 같이 울었다. 그 순간에도 미사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난달 28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리비우로 가는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 AP통신

뒤섞인 사람들 “아이·여성·노약자만”

1일 키이우역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찼다.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사람들이 이를 타기 위해 달려갔다. 아이의 손을 놓치는 부모가 생겼고, 넘어지는 사람도 속출했다. 총을 든 우크라이나 군인들은 “아이와 여성·노약자만 탈 수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혼돈 속에서 군인들이 어린 딸을 열차에 태워줬다. 분명 열차표를 예매했지만, 앉을 수는 없었다. 문 앞 복도에 서서 리비우로 향했다.

리비우의 친구 집으로 갔을 때 이미 4명의 다른 사람이 와있었다. 좁은 집에서 방과 거실에 나눠 잤고, 2일엔 친구의 어머니 등 5명이 또 그 집에 모였다. 리비우 거리는 피난민으로 가득했다. 그곳에서도 끊임없이 공습경보가 들렸다. KDI에서 함께 공부했던 게르트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오면 부모님 집에서 지낼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야 했다. 폴란드와 독일을 거쳐 네덜란드에 가기로 했다.

그날 폴란드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은 모두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버스 옆에 앉은 우크라이나 여성이 말을 걸었다. 그의 부모는 고향에 남았고, 지하실에 숨어있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으로 가는 길이었다.


KDI 동기, 폴란드·독일 사람들의 도움

3일 오전 1시 폴란드 국경을 넘어 독일로 갈 수 있는 터미널에서 내렸다. 터미널 문은 닫혀있었다. 터미널이 열기까진 8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눈이 왔다. 근처를 지나가던 한 폴란드인이 우리에게 다가와 보호소까지 차로 데려다줬다. 보호소에서 큰딸은 아침까지 차를 마시고 무언가를 먹었다. 우크라이나를 떠나고 처음 먹는 물과 음식이었다.

3일 새벽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난민 대피소에서 주스를 먹고 있는 아나스타샤(9). [가리나 소로베이 제공]
그날 오후 보호소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를 탈 때 막내딸이 선로로 떨어졌다. 딸의 손을 잡아 끌어올렸다. 등에 피가 가득했지만, 뼈가 부러진 곳은 없었다. 베를린 역엔 우크라이나 피난민뿐 아니라 독일 자원봉사자도 많았다.

늦은 시간이라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교통편이 없어 하룻밤을 또 보내야 했다. 막내딸은 이미 지쳐 일어서있지도 못 했다. 한 자원봉사자가 우리를 구해줬다. 자원봉사자의 집에는 우리 딸 또래 세 딸이 있었는데, 10대 소녀들은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4일 베를린역에서 5시간 기사를 타고 암스테르담에 내렸다. 그곳에서 게르트를 만났다. 이후 15일 오늘까지 그의 부모님 집에서 머물고 있다. 유럽연합(EU) 국가의 연구직을 찾고 있지만, 곧 다시 사랑하는 키이우로 돌아갈 수 있길 바란다.

KDI 국제정책대학원 동문인 가리나 솔로베이(왼쪽)와 게르트 슬라베쿠름. 지난 5일 네덜란드에 있는 게르트의 부모님 집에서 두 사람은 재회했다. [가리나 소로베이 제공]

세종=정진호기자jeong.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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