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판결이 또 한 번 죽였다”..해군 성폭행 피해자, 엇갈린 판결에 절망

[경향신문]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3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성폭력 혐의 해군 함장 등 장교 2명에 대한 상고심 선고 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강윤중 기자

“오늘의 판결로 저는 또 한 번 죽었습니다”

2010년 해군에 갓 임관한 A씨는 9월 직속 상관인 포술장 B씨에게 강간당했다고 했다. 신상면담에서 B씨에게 성소수자임을 고백했는데 B씨가 “남성 경험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며 성폭행했다는 것이다. 강제추행도 10여차례 이어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함장 C씨는 도리어 A씨를 협박한 뒤 강간했다고 했다.

두 차례 상관으로부터 ‘인격 살인’을 당했다는 A씨는 31일 자신이 한 번 더 죽었다고 말했다. 이날은 B씨와 C씨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는 날이었다. 대법원 3부(재판장 김재형)는 이날 B씨의 군인등강간치상 등 혐의에 대한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했다. 반면 같은 날 대법원 1부(재판장 박정화)는 C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군사법원으로 돌려보냈다. 같은 피해자의 진술이지만 각 재판부는 진술의 신빙성을 달리 봤다.

A씨는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대법원 판단을 규탄했다. A씨 입장문을 대독한 도지현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는 담담한 목소리로 A씨의 목소리를 전했다. “3년을 넘게 기다렸습니다. 파기환송 소식에 잠시 희망을 가졌지만 결국 다시 절망 속에 빠졌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성적 소수자라는 점을 알고도 강간·강제추행을 일삼고 결국 중절수술까지 하게 한 자를 무죄로 판단한 대법원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제가 겪어야만 했던 그 날의 고통, 수많은 날의 기억을 신빙성이 부족하다며 인정하지 않은 법원의 판결을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법률 대리를 맡은 박인숙 변호사도 이번 판결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B씨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이를 상담하는 과정에서 C씨의 성폭행이 발생한 것인데, 두 번째 성폭력만 인정되고 앞선 성폭행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는 “동떨어지지지 않은 일련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다른 사건에 대해선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

재판부의 성인지감수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왔다. B씨는 피해자와 연인 관계였으며 합의하에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A씨는 성 소수자로, 남성인 B씨와 교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재판에서 피해자의 성 정체성에 관한 판단은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며 “연인이었다는 가해자 주장과 달리 성관계가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이를 고려하지 않은 건 재판부의 감수성 부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입장문에서 A씨는 “(이번 판결로) 행복한 군인으로서 살아보고 싶은 저의 소망이 또 한번 짓밟혔다”면서 “부디 후배들은 저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피해를 입더라도 생존자로 살아남기를, 기다림의 시간이 이처럼 길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