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한국경제 발목 잡는 슈퍼 엔저..”달러당 140엔 갈 수도”


엔화 가치 폭락 파장
일본의 엔화는 위기에 유독 강했다. 전쟁이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면 달러 못지않게 엔화 가치가 상승했다. 기축통화로서 지위가 확고했던 것이다. 이는 일본의 넉넉한 외화 자산과 탄탄한 경제 펀더멘탈(기초체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엔화 환율은 과거와는 정반대 흐름을 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는데도 상승(엔화 가치 하락, 엔저)한다. 원자재 가격 급등 등 글로벌 경제가 심상치 않은 상황인데도 힘을 못 쓰고 있다. 수출 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해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부담이다. 엔저는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 향상, 일본 시장 내 한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은 총재 “경기 부양에 초점 맞춰”

올해 초 급격히 상승하다 한동안 크게 움직임이 없었던 엔화 환율은 최근 연일 상승하고 있다. 10일에도 엔·달러 환율은 1달러당 133.47엔으로, 2002년 4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미국 등 주요국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며 긴축에 들어가고 있는데, 일본은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제 정책)로 불리는 양적완화와 마이너스 금리(현재 -0.1%)를 고집하면서 엔화를 팔아 달러를 사려는 움직임이 강해진 영향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의 금리는 올라가고 있는데 일본은 기존 기조를 유지하면서 엔화 환율이 오르고 있다”고 진단했다.

엔저는 기본적으로 도요타 등 일본 수출 기업에는 호재다. 가격 경쟁력이 생기는 데다 달러로 벌어들인 수익을 엔화로 환산하면 기업의 수익 개선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투자 확대나 임금 인상으로 가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일본은행(BOJ·일은)과 일본 정부는 이 같은 논리로 엔저가 일본경제 전체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낙수효과’다. 하지만 당장 국민들은 불만이다. 엔저로 인한 수입물가 상승이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일본 정부가 환율에 직접 개입한 건 약 24년 전인 1998년 6월이 마지막인데, 이번에도 일본 정부의 개입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은 총재는 최근 “현 상황에서 통화긴축은 전혀 적합한 조치가 아니다”라며 “일본의 임금 인상이 부족한 만큼 경기 부양에 초점을 맞출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분기 경제성장률이 -0.2%일 정도로 경기 침체가 이어지는 상황으로, 섣불리 금리를 올리지 않겠다는 의미다. 금리를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지난해 말 기준 256%로 선진국 중 가장 높다. 부채 대부분은 국채 10년물로, 금리를 올리면 이자 부담이 늘어 정부 재정은 더 악화할 수밖에 없다.

일본 정부의 이 같은 엔저 기조는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 수출 기업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져 한국경제의 버팀목인 수출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실제 2013·2015년 1달러당 엔화 가격이 80엔대에서 120엔대로 올라 국내 기업의 수출 실적에 영향을 줬다. 특히 석유화학·석유·가전·철강·디스플레이 업종의 타격이 컸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1달러당 130엔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 정도만 해도 일본 제품과 (한국 제품은) 경쟁력에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원화 가치도 내렸(원·달러 환율 상승, 원저)지만 신 교수는 “원화 가치 하락은 엔화에 비하면 떨어졌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기업이 수출 경쟁력은 나아진 게 없다는 의미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과거에 비해 일본과의 수출경합도가 낮아졌다는 점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내놓은 ‘동아시아 4개국 수출 경쟁력 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자기기·기계·자동차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의 수출경합도지수는 2011년과 비교해 0.8~6.5포인트 하락했다. 이 지수는 특정 국가에 상품을 수출하는 두 나라의 수출 구조가 얼마나 유사한지를 보여주는 지표로, 낮을수록 경쟁이 덜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품목, 그 중에서도 한국의 주력 품목 일부는 한국과 일본이 1위, 2위를 다툴 정도로 경합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이 1위, 일본이 2위를 차지하고 있는 품목은 16개다. 성 교수는 “전반적으로는 경합도가 낮아지고 있는 추세지만 여전히 경합 중인 업종이 많아 엔저가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엔저가 상당기간 이어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인데, 이지평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특임교수는 “1달러당 140엔 정도가 마지노선일 것”이라며 “그 이상 되면 일본 정부도 가만히 있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원화 가치 하락 유도는 물가 압박 부작용

문제는 우리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일본처럼 원저를 유도하기도 쉽지 않다.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원저는 수입품 가격을 끌어올려 인플레이션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수입 물가 상승률은 지난달 이미 역대 최고인 35%를 기록했다. 지난달 수출액은 615억2000만 달러로 5월 기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수입액이 더 가파르게 늘면서 무역수지는 17억10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이 특임교수는 “기업 경쟁력 확대는 물론 금융정책뿐 아니라 재정 긴축, 부채 구조조정, 부동산 가격 안정화 등 거시경제의 안정화를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정일·신수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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