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삼청교육대=전두환 명분…피해자들 "평생 암울하게 살아"

1980년대 삼청교육대에 억울하게 끌려갔던 피해자들이 그곳에서 겪은 비인간적인 상황들과 평생 암울하게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놨다.

9일 방송된 SBS 예능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삼청교육대의 가혹행위와 피해자들의 호소를 들여다봤다.

이날 삼청교육대의 피해자였던 이승호(가명) 씨의 인터뷰가 공개됐다. 이 씨는 “주변에서 굳이 왜 인터뷰를 하냐고 한다. 아무리 사회가 좋아졌어도 안 좋은 인식을 갖고 있는데, 굳이 할 필요가 있냐고. 지금 아내하고 우리 아이들은 모른다”며 감춰온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는 “아직까지 인식이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더라. 43년을 안 바뀌었는데 그렇겠냐”고 호소했다.

때는 1980년 여름, 서울. 18살이던 이승호는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근처 식당에 들어가 초등학교 국어책을 발견했다. 반가워 책을 읽던 승호 씨에게 누군가 “조용히 안 하냐”며 소리쳤다고. 순식간에 몸싸움으로 상황은 번졌고 경찰이 출동했다.

승호 씨는 결국 파출소에 가게 됐다. 다행히 다친 사람도, 파손된 물건도 없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합의나 훈방 조치가 아니었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경찰서로 넘기더니 유치장에 집어넣고, 또 검찰청까지 불려가더니 조사를 받고 구치소에 갇혔다. 승호와 친구들, 상대 일행까지 모두 마찬가지였다.

일주일 후 어느 날, 승호와 일행들은 200여명 사람들과 함께 의문의 버스에 올라야 했다.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얘기를 안 해줘 행선지도 모른 채 무작정 실려갔다.

버스가 멈춘 건 검은 산 속. 주변에 건물 한 채 없이 바닥에선 흙먼지가 뿌옇고, 이중 삼충 철조망이 쳐진 곳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조교들이 몽둥이로 실려온 이들을 마구 폭행했고, 잠시 후엔 공포탄까지 터졌다. 도망가면 사살을 하겠다는 위협이 있었던 것.

끌려온 사람들도 각양각색이었다. 손주 볼 노인부터 앳돼 보이는 소년까지. 그곳은 다름아닌 삼청교육대였다.

1980년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라는 것이 발표됐다. 한마디로 불량배 소탕 작전. 불량배들을 삼청교육대에 보내 새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

해당 문서에 적힌 ‘소탕 대상’은 그 기준이 매우 모호했다. 불건전한 생활 영위자, 재범 우려자 등 정확한 기준점이 없었다. 환갑잔치 중 싸움이 나서 구경을 한 사람, 외상값 있던 사람,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른 사람. 삼청교육대 소탕 대상에 따르면 셋 다 ‘불량배’에 해당했다는 사실에 이날 패널로 등장한 임지연, 윤균상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형과 같이 사진관을 운영하던 야구광 청년 박이수 씨,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야구장 입장 전 줄을 서있던 중 갑자기 끌려갔다. 그의 형 박광수 씨는 “야구표를 들고 대기하던 중에, 사람들 많은데 침을 뱉었단 이유로 바로 끌려갔다”고 증언했다. 그저 이유를 만들어 붙여 마구 잡아간 것.

더 말도 안 되는 케이스도 있었다. 당시 23살이던 한일영은 동네 친구들과 한강으로 물놀이를 갔다. 한창 물놀이를 하던 중 누군가 나와보라며 시비를 걸어서 봤더니 경찰이었다. 바로 파출소로 연행됐다.

알고보니 한일영의 몸엔 문신이 있었다고. 그는 “정확히 모르고 추정만 할 뿐”이라 말했다. 삼청교육대에 잡혀갈 정도면 어떤 문신이었을까. 그 문신은 바로 손목에 자그맣게 적혀있는 ‘삶’이란 것에 불과했다.

한일영 씨는 “난 나쁜 쪽으로 로또 두 번 맞았다 생각이 든 게, 10대 때는 선감학원으로 20대 땐 삼청교육대로, 두 가지 다 경험하게 된 것”이라 털어놨다.

야구장서 침 뱉었다고, 작은 문신 있다고, 식당서 다퉜다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소시민들이 체포영장도, 항변할 기회도 없이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던 건 당시 경찰들의 할당량 때문이었다.

당시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인원은 무려 4만 명. 그중 전과가 하나도 없던 인원은 40%에 달했다. 최고령 73세, 최연소는 14살. 중학생도 17명, 여성도 319명 포함돼 있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끌려간 것.

삼청교육대의 일과는 어땠을까.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총 16시간 동안 연병장 훈련을 반복하고 장비 손질 등 일과를 따라야 했다고. 오전 4시간, 오후 4시간 총 8시간의 훈련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훈련은 목봉체조였다고.

전봇대만한 나무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는 훈련이었다. 목봉의 무게는 최대 300kg이었다고. 보통 10명이 합을 맞춰 훈련하는데, 합이 한 사람이라도 안 맞으면 무게가 몇 배로 더 무겁게 느껴지고 당연히 떨어지게 돼있었다고. 그럼 바로 매타작을 당하게 되는 것.

그렇게 매타작을 몇 번 당하면 겨우 균형이 맞춰지고, 그런 다음엔 목봉에 조교들 2~3명씩 올라탔다. 조교들이 땅에 떨어지면 또 매타작이 이어졌다.

식사는 어땠을까. 먹기 전에는 “돼지보다 못하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자, 소보다 못하면 소고기를 먹지 말자”고 복명복창해야 했다고. 그렇게 밥을 주고선 10초만에 밥을 먹으라고 했다. 당사자는 “먹는 게 아니라 넣는 것”이라 토로했다. 정상 식사에 비교하면 3분의 1 정도 양에 씹을 것조차 없었다고.

장도연은 “적게 주는 이유가 뭔지 아냐”며 그 이유가 적힌 문서를 읽었다. 공복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육체적 반발과 저항력을 감소시키고, 질서 유지에 필요한 복종심을 키우고, 본인의 과오에 대한 회개 속도를 증가시키겠다는 이유였다.

훈련 중 조교들 눈에 거슬렸다면 그나마도 안 줬다고. 한일영 씨는 잘못했다며 먹을 것을 달라 호소했고, 사정사정했더니 조교가 한 쪽으로 데려갔다고 전했다.

한 씨는 “우린 배고파서 남길 것도 없는데 조교들은 막 남기고 그랬다”며 주방 짬통 앞에 자신을 데려갔다고 회상했다. 그는 “먹다 남긴 거, 거기 구더기가 바글바글했다, 여름이다보니. 먹든지, 말든지, 하고 발로 찼다”고 설명했다.

그는 “살기 위해 구더기가 있든 말든 먹게 됐다. 그거라도 안 먹으면 죽을 것 같더라”고 토로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더 최악의 상황은, 화장실도 단체로 조교가 보는 앞에서 볼 일을 봐야 했던 것. 또 야외 웅덩이를 빙 둘러서고 소변을 보게 했다고. 그 웅덩이는 ‘지옥탕’이라 불렸다는데. 오물 웅덩이 속에 개구리를 여러 마리 집어넣은 다음 개구리를 잡으라고 시켰다는 것. 물에 들어가면 잠수를 시켰다고.

야구장서 침을 뱉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던 박이수ㅍ씨, 어느날 형 박광수 씨는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아 이수 씨를 데려왔다. 하지만 멀쩡하던 동생 이수 씨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있었다. 가족을 못 알아보는 건 물론, 밥을 먹다가도 시도때도 없이 비명을 지르고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자해하고, 툭 하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어쩔 수 없이 이수 씨는 10여년 후 요양원으로 옮겨갔고. 국어책 때문에 끌려갔던 승호 씨도 4주 후 집으로 돌아왔더니 동네에서 자신을 보는 분위기가 달라져있었고 다니던 학교에서도 이미 퇴학 처리가 돼있었다.

또 식당서 시비 붙어 고등학생 때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던 승호 씨는 “내가 피해를 당했는데, 현장에 서 있었단 이유만으로 고등학교 퇴학이 됐다. 학력이 중졸 아니냐. 어디 가서 뭘 해먹고 사냐. 인생이 그냥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세상을 원망하며 살고, 삼청교육대 갔다온 뒤 제가 엇나갔다.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더라. 집도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던 중, 승호 씨의 어머니가 아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음 아파하시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다. 나라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이 자식을 못 구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렇게 됐던 것.

승호 씨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다. 할 말이 없고 미안함 뿐”이라며, 그때부터 어머니께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이를 듣던 장도연은 “가해자가 따로 있는데 피해자들끼리 죄책감을 느끼는 이런 게 너무 화가 난다”며 분노했다.

한편 일영 씨는 4주간의 순화교육 후 근로봉사까지 하게 됐다. 무려 6개월 동안 험한 산 속에서 진지 구축, 도로 개간 등 혹독한 작업을 시켰던 것. 이 근로봉사로 강원도의 지형이 바뀌었단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결국 일영 씨는 두 번째로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삼청교육대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였고 잘못했다간 지뢰를 밟을 수도 있는 상황. 일영 씨는 지뢰가 없는 곳을 알게 된 후부터 숲을 기어다녔고, 기차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일영 씨는 기차에 탑승했지만 수상한 행색을 숨기려 화장실로 숨었다. 기차는 천천히 출발했다. 그런데 기차 복도를 걸어오는 군홧발 소리가 들려왔고, 헌병은 문을 열더니 수갑을 채웠다.

일영 씨는 돌아가면 죽는단 생각에 그 자리서 혀를 깨물었다. 탈출에 실패한 일영 씨는 곧바로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일영 씨는 삼청교육대가 아닌 감옥에 가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난 죄가 없었으니까. 군사재판이 내겐 희망이고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고 했지만 그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년 후, 일영 씨는 출소 후 가장 먼저 ‘삶’이란 문신을 지우러 갔다. 굵은 소금으로 살갗이 벗거져 피가 흐르도록 미친듯이 문질렀다. 삶의 희망을 가지려 새겼던 단 한 글자였는데, 지워내야만 했던 것.

일영 씨는 그 후 어렵게 공장에 취직했지만 또 경찰이 찾아왔다. 동네에 무슨 일만 생기면 용의선상에 무조건 올랐다고. 경찰이 삼청교육대 정보를 전산화해 10년 가까이 수사에 활용해온 것. 일영 씨는 “이사를 가도 따라붙더라”며 삼청교육대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됐다고 호소했다.

삼청교육대가 만들어진 이유는 더 충격을 안겼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기 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위원장으로 있었고, 대통령이 되기 위한 명분이 없었던 것.

그렇게 전두환은 ‘정의사회구현’이란 플랜카드를 붙이고 전국의 불량배를 소탕하겠다고 하며 삼청교육대를 탄생시켰다. 곧바로 대대적으로 홍보를 시작했고, 삼청교육대 덕에 사회가 개선됐다는 기사가 쏟아졌다고.

삼청교육대 안에서의 가혹행위는 모두 빼고 건전한 교육을 한다는 영상을 만들어 공개했고, 그걸 본 국민들은 “깡패들은 삼청교육대로 보내댜 한다. 역시 전두환 박력있다”며, 실상도 모른 채 좋게 판단했던 것.

이후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은 직장 해고, 가정 파탄 등 세월이 지난 후로도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이후 1989년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은 “유감된 일”이라는 한마디만 남겼단 사실이 공개돼 분노를 안겼다.

삼청교육대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 397명, 정신 장애 등 상이자 2768명. 그 후로도 끔찍한 삶의 상흔을 남긴 삼청교육대의 창시자는 ‘유감’이란 한마디만으로 죄악을 갈음한 것. 피해자 승호 씨는 “43년이 지났는데 항상 수면제를 먹고, 쫓기는 꿈을 꾼다”고 털어놨다.

야구장서 끌려 간 이수 씨는 아직도 요양원 생활을 하고 있는던 것으로 알려졌다. 삼청교육대에 가기 전 이수 씨의 모습은 건장하고 밝은 모습으로 안타까움을 더했다. 요양원에서 형 광수 씨와 영상 통화를 한 이수 씨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이름, 형의 존재, 자신의 나이조차 모르는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삶’이란 시를 좋아했던 일영 씨. 하루는 딸이 “우리 왜 지금 이렇게 가난하냐”고 했다고. 하지만 일영 씨는 도저히 삼청교육대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고 전했다. 그런 그에게 아내는 “당신이 죄인이 아니잖냐. 피해자는 당신이고 잘못한 건 국가”라고 말해줬고, 그 덕에 용기를 내게 됐다고.

이후 일영 씨는 재심을 청구했고 40여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일영 씨는 “저를 위해서 인권단체 등 많은 분들이 와주셨다. 전부 만세 해주시고, 거기서 뒤돌아 나올 때 울음밖에 안 나오더라”고 말했다. 이어 “평생 암울하게 살아왔다. 20살 청년 때 무죄판결이 나왔다 좀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라고 덧붙였다.

[박새롬 스타투데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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