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테일 혁명]<상>직원도 無, 재고도 無..’없는 게 많은’ 백화점이 뜬다

집에 누워 주문부터 결제까지 15초면 끝. 지금이 온라인 소비 시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처음엔 클릭 몇 번이면 집 앞에 도착하는, ‘쿠팡에도 있는 그 상품’을 사기 위해 더 이상 비싼 기름 값을 들여가며 차를 끌고 백화점으로, 대형마트로 향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팽배했다. 전통 오프라인 유통채널은 온라인발 생존 위기에 직면하자 서둘러 디지털 전환에 나서면서 맞대응을 하는 한편, ‘전에 없던 오프라인 매장’으로의 전면 개편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지인 결혼식에 입고 갈 고급 의류를 사기 위해’ 등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백화점에 향하던 이들이, ‘이번 주말 데이트 장소’로 백화점을 찾는 변화가 일어났다. 카트 한 가득 맘먹고 장을 보러 가던 마트에선 유모차를 끄는 가족 단위 방문객이 활어 손질을 맡기고 마트 내 키즈카페로 향하는 풍경이 일상이 됐다. 편의점에선 급하게 한 끼를 때울 컵라면을 찾는 대신 은행 업무를 보고, ‘다이슨 에어랩’과 같은 생활에 유용한 ‘잇템’을 대여한다. 스스로를 경유지가 아닌 목적지로 만들고 있는 오프라인 채널들의 구조적 변화, ‘리테일 혁명’이 무르익고 있는 시점에서 이들이 채워 넣은 ‘굳이 찾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아시아경제 김유리 기자] 백화점 업계의 ‘목적지’ 싸움에 불이 붙었다. 백화점이 필요한 상품을 구입하러 들르는 경유지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목적지인 ‘머물며 즐기는 놀이공간’으로 진화하면서다. 어느 백화점에나 있는 고급 상품을 나열하듯 진열만 해둬도 경쟁력이 있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소위 ‘쿠팡에선 못 사는’ 뜨는 상품을 발굴하고,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나도 해봤다’ 심리를 자극하는 새로운 경험을 집어넣어 이들의 방문 욕구를 건드려야 목적지 경쟁에서 선택받을 수 있다. 방문 만으로도 ‘힐링’이 되고 즐거울 수 있도록 공원, 전시관, 과학관 등 즐길거리를 갖추는 건 덤이다.

‘상품 재고가 없는 매장’, ‘직원이 없는 매장’ 등 ‘없는 게 많은’ 백화점이 뜨는 이유도 이 ‘새로운 경험’과 직결돼 있다. 대표적인 곳이 롯데백화점 동탄점 3층 의류매장 ‘#16’이다. 2030세대 고객 발길이 끊이지 않아 지난해 8월 오픈 이후 현재까지 여성의류 매출 수위권에 있는 인기 매장이다. 특징은 롯데백화점과 온라인 패션 플랫폼 ‘하고’가 손잡고 낸 ‘재고 없는 매장’이란 점이다. MZ세대에게 인기 있는 국내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 16곳의 제품이 사이즈별로 1개씩 진열된 이곳에서 고객은 옷·가방 등을 직접 착용해본 후 직원에게 ‘새 상품’을 요구하는 대신, 휴대폰을 연다. ‘오더하고’ 애플리케이션(앱)에서 제품 바코드를 스캔해 주문하는 방식이다. 고객은 직원 눈치를 볼 것 없이 온라인 사이트에선 풀지 못했던 ‘사이즈 고민’을 해결하면서 온라인 주문을 할 수 있고, #16 입장에선 재고 관리 부담을 덜면서 해당 공간에 더 많은 상품을 선보일 수 있으며, 백화점은 MZ세대 고객을 불러 모을 수 있어 서로 플러스인 시도다. ‘재고 없는 매장’이 성공을 거두면서 롯데백화점은 올해 추가로 5곳을 비롯, 2년 내 매장을 20여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더현대 서울 6층 ‘언커먼스토어’는 ‘직원 없는 매장’이다. 이곳 역시 주말 대기 순번이 300번대까지 이어지는 등 2030세대에게 큰 인기다. 백화점 앱을 이용해 매장에 입장한 후 상품을 집어 들고 나가면 자동 결제되는 방식이다. 33㎡ 크기 매장은 오렌지 컬러로 ‘인증샷’이 잘 나오게 디자인됐고, MZ세대가 좋아할 만한 식료품과 문구 등으로 가득 채웠다. 천장 인공지능(AI) 카메라 40대가 고객 움직임을 분석해 구매 여부를 파악하니, ‘물건을 그냥 집어 나와도 자동 결제가 되는’ 새로운 경험이 가능하다. 이들의 새 경험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빠르게 전파되고, 이를 본 또 다른 MZ세대의 ‘나도 해봤다’ 행렬에 동참하고픈 욕구에 불을 댕긴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1층에 ‘명품 부티크’가 없다. 지난해 7월 리뉴얼로 1층을 가장 자리까지 화장품 등으로 채워 대박이 났다. 국내 최대의 럭셔리 화장품 전문관을 열고 뽀아레, 스위스퍼펙션, 지방시, 구찌 뷰티, 로라 메르시에 등 신규 뷰티 브랜드 7개를 포함해 총 50여개 브랜드를 한자리에 모아 ‘코덕(코스메틱 덕후)들의 성지’가 됐다. 그 결과 지난해 7월27일부터 올해 2월 말까지 강남점의 화장품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0% 뛰었다. 전체 구매 고객 수도 10% 증가했다. 코로나19로 마스크가 필수품이 된 가운데 색조 화장품 대신 향수가 주목을 받으면서 딥티크, 바이레도 등 향수 장르도 같은 기간 33% 신장했다.

이같은 ‘새로운 경험’을 몇 개만 거쳐도 서너 시간이 지나고, 양손은 구매 상품으로 가득해진다. 백화점들은 고객 체류 시간을 늘릴 콘텐츠를 빠르게 바꿔가며 선보인다. 트렌드 세터 사이에서 떠오르는 브랜드를 ‘팝업 스토어’ 형태로 짧은 시간 발 빠르게 선보이는 방식이 자리 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같은 변화로 롯데, 신세계, 현대백화점의 지난해 2030세대 매출 비중은 각각 35.9%, 41.2%, 43.4%까지 늘었다.

전문가들은 백화점들의 공식을 깨는 새로운 실험과 시도가 앞으로 더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고객 체류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측면에서 경쟁 상대는 비단 e커머스 등 온라인 채널뿐 아니라 고객의 여유 시간을 점유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 문화 콘텐츠까지 확대할 수 있다”며 “새로운 정보와 재미, 휴식 등에 대한 만족감이 OTT 시청을 넘어설 수 있는 콘텐츠를 추가 확보하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유리 기자 yr6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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