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폐허 딛고 일어난 71년.. 아직도 풀지 못한 ‘한’

[글 최규화/사진 김일우]
“나도 죽을 뻔했죠. 우는 바람에 살았지. 기어코 내가 살아 있는 게, (희생된) 영령들을 내가 책임지고 한을 풀어드려야 한다고 나를 이렇게 살려놓은 것 같아.”

“우는 바람에” 살아남은 네 살 꼬마는 70대 중반의 노인이 돼 다시 굴 앞에 섰다. 할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겨우 두 돌이 된 동생까지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은 곳. 조병규 단양곡계굴유족회 회장은 가벼운 웃음을 띠며 말했지만, 웃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거운 감정들이 짙게 깔려 있었다.

1951년 1월 충북 단양군 영춘면.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길은 미군에 의해 막히고, 설상가상 마을은 공중공격과 소각작전으로 모두 불탔다. 주민들과 피난민들은 상리에 있는 곡계굴로 몸을 숨겼다.

“캄캄한 느낌,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던 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있어요. 할아버지하고 고모하고 이틀을 여기서 잤는데, 그날은 하도 울어가지고 쫓겨난 거야. 열세 살이던 고모가 나를 업고 나와서 엄마한테 데려다 주고 고모는 다시 굴로 들어갔는데, 다음 날 아침에 폭격을 한 거야.”

▲곡계굴 앞에 선 조병규 회장. 이곳에서 할아버지와 고모, 두 살배기 동생이 희생됐다. ⓒ김일우
▲곡계굴 입구. 피난길은 막히고 마을마저 불타자, 피난민들은 곡계굴로 몸을 숨겼다. ⓒ김일우

1월 20일 오전, 곡계굴은 불길에 휩싸였다. 미 공군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사람들은 불에 타 죽거나 질식사했다. 굴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기총사격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2008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200명 이상 숨졌을 것으로 추정했고, 희생자 167명(곡계굴 외 희생자 포함 172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확인된 희생자 중 19세 이하 어린이와 청소년이 무려 62%였다. 여성의 비율도 절반이 넘는 52%였다.

▲하늘에서 본 사건 현장. 사건이 일어나기 전 느티마을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었다. ⓒ김일우
▲사건 현장에 세운 위령비.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희생자 172명의 이름을 새겼다. ⓒ김일우

조 회장과 함께 곡계굴 속으로 들어가 봤다. 사선으로 기울어진 굴을 따라 몸을 비스듬히 눕히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디뎠다. 어른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가는 좁은 입구를 지나니, 안쪽으로 몇 사람 모여 앉을 만한 공간들이 나왔다. 하지만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쉬이 믿기지 않았다. 그중 200여 명 이상이 까닭도 모르고 한날 한자리에서 죽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기 힘들었다.

“엄동설한에 집 한 채도 없이 살아간 유족들을 생각하면 정말 기가 막힐 일 아닙니까. 71년이에요, 71년. 폐허 속에서 일어난 겁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나 비참하죠. 눈물 날 지경이죠.”

▲곡계굴 내부를 안내하는 조병규 회장. 이곳에서 최소 200여 명이 불에 타 죽거나 질식사했다. ⓒ김일우

조 회장이 선친의 뒤를 이어 단양곡계굴유족회 회장을 맡아 동분서주 해온 세월도 벌써 17년. “번개같이 지나가 버린” 그 세월이 더 야속한 것은 유족들의 가슴에 남은 한을 아직 다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에도 불구하고 배·보상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해서는 국가가 책임을 지도록 돼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에게 1원조차 (배·보상이) 없다는 것은 국가로서 책임질 일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최근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4월 곡계굴 사건 무연고 희생자에 대한 유해발굴 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마을 주민들의 유해는 사건 직후 유가족들에 의해 수습됐지만, 무연고 시신은 그대로 방치되다가 야산에 매장됐다. 이후 1970년대 야산 일대가 개발되면서 무연고 희생자 유해는 다시 이장됐다.
▲약 한 달간의 발굴 작업을 통해 유해 51구가 수습됐다. ⓒ김일우
▲지난 3월 28일부터 4월 25일까지 곡계굴 사건 무연고 희생자 유해발굴 사업이 진행됐다. ⓒ김일우
▲수습된 유해를 감식 중인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 ⓒ김일우

유해발굴 현장을 둘러보던 조 회장은 이따금 발걸음을 멈추고 “아이고…” 낮은 탄식을 내뱉았다. “영령들이 제대로 잠들지도 못하고 구천을 헤매고 있었을 것 같다”던 무연고 유해는 모두 51구가 수습됐다.

“근래에 외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남의 일처럼 보고 있지만, 이렇게 비참하게 희생된 사람들 입장에서는 남의 일이 아니에요. 이것만큼은 국가가 명확히 해결해줬으면 하는 게 유족들의 간곡한 바람입니다.”

▲하늘에서 본 유해발굴 현장. 수습된 유해는 세종시 추모의집에 안치됐다. ⓒ김일우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리 129번지 일대 곡계굴 사건 현장 ⓒ김일우

※ 이 글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6호에도 실립니다.

[글 최규화/사진 김일우]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