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로 따라 자박자박.. 숲길 걸으며 만나는 협궤열차-봄꽃-벽화들

9일 오후 서울 노원구 경춘선숲길 3구간에 위치한 화랑대 철도공원. 시민들이 지금은 산책로로 탈바꿈한 옛 경춘선 기찻길을 걸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저녁이 되면 공원 곳곳에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이 켜지며 ‘불빛정원’으로 변신한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분명 서울 도심인데 어느새 숲길이 나오더니 검은색 증기기관차가 보였다. 체코와 일본을 각각 누볐던 트램(노면전차)들도 곁을 지키고 있었다. 녹슨 철길을 따라 시공간을 넘어온 기차들이 모인 이곳은 노원구 ‘경춘선숲길’이다.

○ 기차가 날라주는 커피

경춘선숲길은 6km가량의 산책로다. 원래 이곳은 1939년 개설된 ‘경춘선’이 달리던 기찻길이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지난 후에는 무궁화호를 타고 MT를 떠나는 대학생들이 몰리면서 ‘경춘선’은 한때 청춘의 대명사로 통했다. 2010년 운행 71년 만에 경춘선이 폐선되면서 한동안 방치됐다가 2013∼2017년 정비를 거쳐 경춘선숲길로 재탄생했다.

8일 기자가 걸은 이 길에는 녹슨 철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기성세대는 추억을 되새기고, 젊은 세대는 레트로 감성을 느끼도록 원형을 보존해 길을 만들었다. 건널목에도 ‘멈춤’ 글씨와 함께 낡은 신호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경춘선숲길은 △1구간(녹천중학교∼공릉동 과기대 입구 철교) △2구간(행복주택공릉지구∼육사삼거리) △3구간(옛 화랑대역∼삼육대 앞)으로 이뤄져 있다. 예전 흔적을 가장 많이 간직한 곳은 3구간에 위치한 ‘화랑대 철도공원’이다.

철도공원이란 명칭에 걸맞게 과거 운행했던 협궤열차와 대한제국 시절 전차 등 다양한 열차가 전시돼 있다. 퇴역한 무궁화호는 박물관으로 변신해 전 세계에서 수집한 시계 95점을 전시하고 있다.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이었던 ‘옛 화랑대역’도 고스란히 남아 이색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역사 내부는 ‘화랑대역사관’으로 꾸며 옛 승차권, 찌그러진 철제 책상 등을 그대로 보존해 놨다.

기차카페 ‘기차가 있는 풍경’도 인기다. 미니 모형 열차가 음료를 싣고 자리로 배달해주는 모습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일몰이 찾아오면 철도공원은 ‘불빛정원’으로 변신한다. 공원 전체에 발광다이오드(LED) 은하수 조명과 불빛터널 등 조형물 17종이 불을 밝혀 데이트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 기찻길 따라 만나는 숲과 공트럴파크

1·2구간은 볼거리가 많은 3구간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1구간을 걷다 보니 서울을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철길을 가운데 두고 한쪽에 조성된 잣나무와 소나무 숲길 덕분이다. 함순교 공릉동 마을해설사(56)에 따르면 800m 정도 이어지는 이 숲길의 이름은 ‘솔숲길’이다. 반대편에는 텃밭과 줄지어 선 미루나무들이 보인다. 미루나무 아래 앉아서 쉴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있고, 봄이 되면 철길을 따라 꽃이 만개한다. 춘천을 오갔던 열차의 낭만과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무궁화호 열차를 옮겨 와 내부에 방문자센터를 만들었다. 1구간 초입에 있는 ‘경춘철교’도 명물이다. 71년간 중랑천을 가로지르던 철교가 보행자 전용 다리로 탈바꿈했다.

공릉동 일대를 가로지르는 2구간은 주민 산책로로 인기다. 이날도 산책을 나온 주민들로 붐볐다. 아파트 옹벽을 이용해 만든 경춘선숲길 ‘오픈갤러리’가 있어 작품을 구경하며 걸을 수 있다. 구본준 작가의 입체 벽화들이 대표적인데, 국내 최대 날개 부조 작품인 ‘사랑의 날개’ 앞에서 인증샷을 찍는 이들이 많다. 그 밖에도 전문 작가나 주민 작품을 야외에 전시하는데, 현재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빛: 영국 테이트미술관 특별전’과 연계해 명화 레플리카를 전시 중이다.

노원구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인 ‘도깨비시장’도 2구간에 있다. 도깨비방망이처럼 뭐든 나온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손칼국수, 닭강정, 술빵 등 먹거리가 유명하다.

2015년 경춘선숲길 중 2구간이 가장 먼저 개통되고 사람들이 모이자 철길 주변에 카페, 식당, 책방 등이 생겨났다. 세련된 상점들이 오래된 시장과 공존하며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청년들 사이에선 ‘공리단길’ ‘공트럴파크’로 불린다. 이날도 해가 저물자 철길 옆 골목골목에 자리 잡은 와인바, 식당이 하나둘 불을 켜고 젊은 손님들을 맞이했다.

이청아 기자 clearlee@donga.com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