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떠날 테면 떠나라..러시아의 역습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미국 등 서방을 중심으로 각종 경제 제재가 잇따르는 가운데 서방의 주요 기업들도 속속 러시아를 떠나고 있습니다. 애플과 구글 같은 빅테크 기업, 맥도날드와 스타벅스 같은 식음료기업까지 줄줄이 러시아 사업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다른 글로벌 의류기업들과 달리 러시아 시장에 남겠다고 밝혔던 일본 패션브랜드 유니클로도 끝내 현지 사업 중단을 발표했습니다.

해외 기업들이 떠나면서 당장 타격을 입은 건 러시아의 소비자들입니다. 쓰던 혹은 먹던 물건을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면서 한 이케아 매장에선 냄비 하나를 두고 고객 2명이 서로 쟁탈전을 벌이는 풍경이 SNS에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내에서도 반전 여론이 적지 않은 걸 감안하면 러시아의 일반 국민 역시 전쟁 피해자인 셈입니다.

‘떠나는 기업, 경영권 넘겨라’…국유화 움직임도

러시아도 기업들의 ‘탈러시아’ 움직임에 맞서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습니다.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국영 매체를 통해 방영된 영상에서 “생산을 중단하려는 이들에게 단호하게 행동해야 한다”며 “외부 경영진을 도입하고 이들 기업을 일하고 싶은 이들에게 넘길 필요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 러시아 정부도 푸틴 대통령의 발언을 현실화할 법안을 마련했습니다. 새 법안은 외국인 보유 지분이 25%를 초과한 회사가 러시아 내 사업을 접으려고 할 경우, 법원이 이 회사에 러시아 국책은행 VEB 등 외부 경영진을 선임하게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또 법원이 회사 자산과 일자리 보존을 위해 해당 회사의 주식 거래를 동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분을 보유한 외국인은 5일 이내 영업활동을 재개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지분을 매각해야 하는 걸로 알려졌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아예 해당 기업들을 국유화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러시아 대통령과 총리를 지낸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것으로, 러시아 정부가 자국을 떠나는 외국 회사의 자산을 국유화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현지 매체는 한 소비자 단체가 국유화 가능성이 있는 외국 기업 명단을 작성했다고 보도했는데, 이 명단에는 애플과 폭스바겐, 이케아, 마이크로소프트, IBM, 맥도날드, 도요타 등 59개 기업이 포함된 걸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국유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단 거리를 두는 모습입니다. 이번 조치는 외국인 기업들이 러시아 내에서 활동을 접지 않도록 장려하기 위한 것이라며 자산 국유화보다는 자산 매각에 무게를 뒀음을 내비쳤습니다.

비우호국, 지적재산권 보호 안 한다

러시아의 대응은 러시아 내 외국 기업 자산 뿐 아니라 지적재산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러시아가 ‘비우호국가’와 관련된 특허의 도용을 사실상 합법화했다고 전했습니다. 러시아 정부가 지난 7일 발표한 명령에서 비우호국에 등록된 특허 소유자의 보호가 없어진다고 선언했다고 말했습니다. 즉, 러시아 기업들이 허가 없이 특정 특허를 사용하더라도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지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은 러시아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일부 상표권에 대한 제약을 없애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경우 맥도날드처럼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기업 브랜드를 러시아 현지 업체가 계속 사용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습니다.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러시아 정부는 지난 7일 우리 나라를 비롯해 자국 제재에 동참한 미국, 영국, 호주, 일본, 유럽연합(EU) 회원국 등 48개국을 비우호국가로 지정했습니다. 다분히 미국과 유럽 등을 겨냥한 조치이지만 우리 나라도 영향이 있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 기업들은?

우리 기업들의 고민도 커졌습니다. 러시아 자동차 시장에서 점유율 약 23%( 현대차·기아 합산)로 3위를 차지하고 있는 현대차그룹은 아직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현대차는 2014년 크림반도 사태 때도 현지 사업을 철수하지 않고 지켜내면서 시장 점유율을 높였던 적이 있습니다. 수십년 간 공들여온 러시아 사업이니 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차는 다만, 영국 정부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첼시의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를 제재 명단에 올리자 연간 1천만 파운드로 알려진 클럽 첼시에 대한 후원을 중단하는 등 러시아 외 지역에서는 나름 적극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현지에 공장을 두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크림반도 사태 때 있었던 전례로 비춰볼 때 만약 우리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사업을 철수할 경우, 우크라이나 사태가 종료된다 해도 다시 러시아에서 사업을 할 수 없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 기업들로서는 ‘탈러시아’를 이어가는 국제사회와 러시아 사이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기에 당사자인 우크라이나 눈치도 봐야 합니다. 실제로 미하일로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부총리 겸 디지털혁신부 장관이 삼성 측에 러시아 내 사업 중단을 요청했습니다. 페도로프 부총리는 현지시간 4일 트위터에서 “(삼성이) 세계 평화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면서 “러시아의 탱크와 미사일이 우크라이나의 유치원과 병원을 폭격하는 한 삼성의 멋진 제품이 러시아에서 사용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또 자신이 전날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보낸 서한도 첨부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다양한 압박 요소와 함께 고려할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고 서방 기업들이 속속 러시아를 떠나는 있는 상황에서, 우리 나라 기업들만 계속 러시아에 남아 사업을 이어 갈 경우, 자칫 국제 사회, 세계 소비자들로부터 비난 받을 소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전쟁의 화마에 휩싸인 우크라이나 국민을 위해, 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리 기업들을 위해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길 바라봅니다.

남승모 기자smna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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